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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감상에 대하여 |  비구상미술(非具象美術)  |  추상미술(抽象美術)

월나라 사람이 뱀으로 곰탕을 끓여 진나라 손님에게 대접했다. 손님은 맛을 보고잉어 곰탕이라고 생각하였다. 먹고 난 후 그것이 뱀 곰탕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는 목구멍에 손을 넣어 토했다. 이것은 아직 맛을 모르는 것이다." 라고 유주(劉晝)는 말했다. 또한 "송 나라 사람이 연석(燕石)을 습득했는데 그것을 진귀한 옥(玉)이라고 생각하고 구리로 만든 상자에 잘 보관하였다. 뒷날 그것이 평범한 돌이란 것을 알자 상자까지 모두 버렸다. 이것도 옥을 모르는 것이다. 뱀탕을 잉어 곰탕이라고 생각하고, 연석을 옥이라고 생각한 것은 자기 인식 능력에 의한 판별이다. 오판하는 원인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의 심미안을 믿는데서 오는 결과이다. 사실, 작가가 귀기(鬼氣) 어린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어두운 색조로 그렸는데 감상자는 자기 취향에 맞게 밝은 색으로 그렸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또한 그 전의 그림은 좋았는데........(어쩌구) 라는 말은 작가는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감상자는 고정되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배경을 동양의 산수화풍으로 그린 것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는 서양의 평자도 있다고 볼 때, 유주의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심괄(沈括)은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형상이나 구도, 색채상에 있어서의 결점을 지적할 뿐이다. 그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오묘한 이치 등을 감상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라고 말했다.  

또한 왕희지, 고개지, 육탐미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고 하여 세인이 다투어 사들였을 때, 심괄은 이러한 현상은 "그림을 귀로 감상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비록 그들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작품 모두가 다 훌륭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심미 형식을 기준으로 하여 감상한다기보다는 평가, 비평하는 자세로 작품을 대한다. 평가는 감상 이후의 문제이다. 먼저 감상한 후에 그것에 대한 어떤 비평을 가하는 것은 감상자의 자유이다. 작품을 작가 편에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작품이란 감상자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내가 그린 그림이야 .어때. 그 어떤 이 왈 "내가 그림이 잘 되었나 못 되었나 알아야지."그렇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분별>만 배운 것 같다. 살아가기에 힘겨워 항상 두려움을 느껴 온 결과, 마음의 성문이 방어 태세로 닫혀 있다. 예술품을 앞에 두고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왼쪽 두뇌로 판단만 하려 한다. 인생이 불행하다면 그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한 여성이 타자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한 장 있다고 하자.어떤 사람에게 보여 주고 무엇이 보이는지 말 해 보라고 하자.십중팔구 "탁자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군" 하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다시 이 그림을 좀더 예민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다고 하자. 그는그 앞 사람보다 자세하게 여자의 몸차림이라든가, 그림의 구성, 색채의 배합, 느낌 등을 얘기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반응의 범위나 섬세함의 정도가 더욱 넓어서, 그림을 훨씬 잘 감상할 수 있다. 감상자의 눈도 다 같은 눈이 아니니 더욱 더 가슴을 열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동파의 대나무 그림을 보고 그것이 아무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 예술가의 견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잘못이다. 동양에서는 사진과 같이 실물 근사치로 묘사하는 것이 첫째 목표가 아니었다. 예술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가 아니라, 그가 바람에 시달리는 대나무를 바라 보았을 그 순간에 화가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 모든 것을 자기의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그 순간 자체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섬세한 표현을 하자면 고도의 정신 집중과 기술적인 숙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술가는 붓을 들기 전에 그가 종이 위에 옮겨 놓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영상을 마음 속에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상이 분명치 않으면 그 분명치 않음이 곧 그의 획에 나타나고, 그 결과로 나타난 머뭇거리는 획은 예술가 뿐만 아니라 자연의 도(道)도 훼손한다. 두보(杜甫)는 다음과 같이 예리한 관찰의 결과를 말했다. "바위 하나를 그리는 데에는 10일이 걸리고, 개울을 하나 그리는 데에는 5일이 걸린다."라고,물론 여기서의 시간은 기술적인 표현 시간을 말함이 아니고, [내적인 명상]에 소요되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사상이 마음 속에서 영상화되면 붓을 들고 확실하고 민첩하나, 결코 속되지 않은 필치로 그 사상에 형태를 입힌다. 가장 중요한 것을 스스로의 삶에 우주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非具象美術)-art non-figurati

직관이나 상상으로 자유로이 표현하려고 하는 미술. 광의의 추상회화에 속하며 농피귀라티브(Non-figuratif)라고도 한다. 이는 피귀라티브(figuratif), 즉 구상·상형 또는 형상에 대한 조형개념으로, 구상적 또는 즉물적인 외계의 이미지를 조형면에 남기지 않는 것을 뜻한다. 1910∼16년 무렵부터 많은 작가들이 각기 독자적인 탐구를 거듭하여 일체의 자연주의에서 탈피한 선·색·형태의 조작에 의해서만 내적 정감을 순수하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칸딘스키를 비롯하여 오르피즘(Orphism)의 들로네, 쿠프카, 레요니즘의 라리오노프, 구성주의의 타틀린, 비대상주의(非對象主義)의 로드첸코, 절대주의의 말레비치, 그리고 몬드리안 등이었다. 음악이나 건축과 같은 내적 자율성을 찾아 저마다 조형수단 속에 자연을 추상화한 것으로, 거기에서 추상미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다음으로 20년을 전후해서, 이 추상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이 특히 몬드리안이나 데 스틸 운동에 의해 자연에 대한 독립성과 예술적 자율성을 확립하는 데 따라, 더욱 본질적 명칭이 필요해져 신조형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외계의 대상을 변형시킨 입체파, 제재를 거의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원형을 단순화해버린 실험적 작품도 일반적으로는 추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객체적인 자연형태와의 연관을 남긴 것과는 분명히 구별하기 위해, 순수한 추상미술을 비구상미술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즉, 추상미술의 제2의 단계이다. 32년 파리에서 결성된 그룹 ‘추상·창조’는 각 경향의 추상예술가를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에 대항해서 재조직하려는 것이지만, 그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   비구상  / 설명적·문학적·자연주의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한 순수 조형의 개발,
  •   추상  / 자연의 여러 형태에서의 점진적(漸進的) 추상에 의해 비구상의 개념에 달한 것,
  •   창조  /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질서에 의하거나 또는 원·면·선이라고 하는, 보통 추상적이라고 불리는 요소만으로 직접 비구상에 달한 것이다.

즉, 자연의 묘사를 저버린 비구상예술 속에는, 몬드리안처럼 수목(樹木)의 사생으로부터 차차 추상화해가는 것과, 모티프 그 자체가 대상을 갖지 않는 공간의 요소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이 쓰이고 있는 농피귀라티브의 개념은 ‘추상·창조’ 시대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전후의 추상은 전의 창조에 해당하는 순수한 기하학적인 구성을 가리키는 데 대해, 거꾸로 비구상은 예전에 추상이라고 불린 것과 같은, 구상과의 관련을 남긴 추상예술을 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후에는 추상예술 그 자체의 커다란 추이(推移)가 있다. 쉬르레알리슴은 고전적 인간관을 깨뜨리고 생명의 근원이나 무의식(無意識)의 세계를 탐구하려고 해서, 인체나 동물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형태(形態)의 단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생명적 리듬에 찬 곡선이나 터치는 추상적 세계와 외적 시각(外的視覺)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연과 인간이 교류하는 리듬을 나타내려고 하는 선이나 브러시 터치를 보이는 그림도 쉬르레알리슴에 나타난다. 그리고 큐비즘을 다시 검토하여 추상세계와 현실의 생활공간과의 연결을 되찾으려는 요구도 강하다. 그래서 인물이나 풍경과 같은 외부세계의 모티프로부터 출발해서, 그 형태를 빛과 윤곽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구성해가면서 자연으로부터 추상된 이미지와 내적 관념 속에서 생겨나는 이미지와의 통일을 강하게 찾고 있다. 이것은 바로 추상예술이 그것과 대항하여온 쉬르레알리슴과 새로운 교류나 종합의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30년대의 추상과 창조는 전후의 농피귀라티브 속에 종합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은 ‘차가운 추상’에서 ‘뜨거운 추상’으로의 움직임으로 꽤 일반적인 것이 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살롱 드 레알리테 누벨’이 중심이 되어 추상미술의 국제적 거점이 되었으나, 벌써 형식주의적 장식성에 빠져들어 순수한 조형정신을 잃어버렸다. 미국에서는 비대상미술(非對象美術)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농피귀라티브의 작품은 그런 만큼 추상과 구상,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절충이라고 하는 약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추상과 비구상

주변에서 사람들은 쉽게 ‘추상미술’, ‘비구상미술’ 혹은 ‘반추상미술’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추상’이라는 말조차 낯선 우리들은 이런 말들을 구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간단히 말해서 추상미술은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 미술이다.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대상(사람, 꽃, 동물 등)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비구상’이라는 것은 ‘추상’의 한 종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추상은 기존의 미술이 갖는 재현적인 요소로부터 탈피하는데서 시작되는데, 아예 처음부터 작가가 재현의 대상을 염두에 두지않고 그려낸 것은 비대상(非對象)미술, 어떠한 대상을 작가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한 것을 비구상(非具象)미술이라고 하며 이런 것 등을 통틀어 '추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반추상’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이것은 추상화되는 정도의 문제에서 나누어진 경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추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추상화의 정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정정도 표현의 대상 형태를 화면에서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그림을 말한다. 1890년 모리스 드니는 “회화는 전쟁터의 말이나 나부이기 이전에 질서를가진 색채로 덮여진 평면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회화가 지금까지 사물의 묘사에 치중했던 것을 벗어나는 상징적인 말이다.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의 발전경로를 보면20세기에 들어와 야수파는 색채의 해방을 주장하고, 큐비즘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평면에 담았고 미래파는 스피드한 시각언어를 보여주었다. 한편 러시아 구성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감정의 표현을 다룬 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등등 무수한 추상 미술의 갈래들이 생겨났다.

 

 참고자료(도서)→  도서출판가나아트의 알고나면 미술박사 / 미술대전 /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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